요즘 들어서 니체의 사상이 재조명되는 이유와 허무주의
니체.. 헤겔 이후 유럽 철학에서 니체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니체가 요즘에 와서 새롭게 조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 사회는 다양한 영역에서 도전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4인가구인 핵가족조차 이젠 옛말로 되어가고, 1인 세대 비중이 늘어가며 자유로운 생활 및 의사결정이 점점 더 쉬워져 가며 개인주의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조직으로부터 분리되고 독자성을 얻으면서 이제는 내가 어떤 조직문화에 얼마나 잘 흡수되느냐, 사회생활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나 한 명이, 나 개인이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가 화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개인이 많은 중요성을 갖게 되고, 결정권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을 나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문제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분석가인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책 내용을 보면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던 독일인들이 혁명으로 세운 '바이미르 공화국'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나치를 지지함으로써 애써 얻은 자유를 버리고, 자발적인 복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잘 분석이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자유의 짐'으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존재라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가 주어진 다고 해도 외부로부터 제공되는 가치체계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해서 사회와의 연결성이 희미해지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여러 규율들의 정당성 내지는 권위가 약화되다 보면 결국엔 어느 지점에선 개인이 '그래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될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절대적 가치였던 가톨릭 교회의 막장으로 치닫는 부패로 인해 면죄부를 이용하여 구원을 돈으로 팔아먹기 시작했고, 마르틴 루터의 의해 개신교가 태동되며 이는 결국 절대신에 대한 믿음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조차 결국 상대적인 것이라 귀결됨에 따라 더 이상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존할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확산되었습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져내리는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 따라 '허무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때 등장한 니체가 유럽세계의 단상을 자신의 철학으로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소극적 허무주의와 적극적 허무주의
니체는 허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시대에 사상가로 활동을 하며, 이를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에서 소극적 허무주의와 적극적 허무주의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는 단계를 낙타와 사자의 우화를 예를 들며 이를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소극적 허무주의란, 나에게 주어진 허무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일시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쾌락의 노예가 되거나, 이기주의로 도피함으로써 허무를 마주하기보단 회피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이 부과한 기준이나 가치관에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낙타의 단계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첫 단계는 바로 '낙타의 단계'입니다
낙타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의심 없이 묵묵히 짐을 싣고 다니는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스스로 사고할 줄을 모르기에 체념하고 체제의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존재입니다
부당한 것이 뭔지도 모르고 의심 없이 고독하고 막막한 사막을 걸어갈 뿐입니다.
사막에서 아무리 많은 발걸음을 걸어도 발자국은 바람에 지워지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적극적 허무주의란 나에게 나타나는 허무라는 현상을 똑바로 직시하고, 내가 나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내 인생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두 번째 단계는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투쟁하고,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싸우며 자유를 쟁취하지만, 막상 자유를 쟁취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방황합니다.
그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행복하고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갈망했던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마치 정신적 수양이 덜된 히어로와 같습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왕이 되었지만, 어떻게 통치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전쟁이 사라지자 곧 무기력에 빠져 권태에 빠져서 타락하고 추락하게 됩니다
사자는 낙타에 비해서는 똑똑하고, 용감하지만 아직 상대와 무조건 싸우려고만 하는 미성숙함이 남아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사자와 낙타' 비유나 초인사상은 결국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낙타가 노예를 나타내는 것이고, 사자가 초인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어린아이의 단계'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고정관념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기존의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인 편견을 갖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어린아이는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겪던 불평하지 않고 매사에 즐겁고 천진합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작중 짜라투스트라는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이 처럼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던 니체의 사상은 '무(無)'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모색해 보자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허무주의는 준비되지 못한 미성숙한 개인의 자유로 인해 발생한다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원회귀'는 가톨릭적 세계관의 붕괴와 과학의 한계로 인한 따른 절대적인 믿음에 부재로 인한 세계를 감싸는 불안과 허무주의적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치유책으로써 고안된 사상입니다
낡고 썩은 기존의 가치관을 망치로 때려 부수고 새로운 가치로 대체하여 마지막 시련을 이기고, 삶의 절대적 긍정을 노래하기 위한 니체의 희망이 담긴 철학이기도 합니다
초인이란 헐크 같은 괴물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초능력을 가진 마법사 같은 존재도 아닙니다.
이상의 세계를 위해 해탈을 하여 지상의 삶을 등 저버리는 신성을 가진 존재도 아닙니다.
초인이란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며, 형이상학적인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가식이나 속임수 없이 끊임없이 한계와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없었으면 우리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과 친구들, 선생님들, 우리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 우리가 도움을 줬던 사람들, 오고 가며 서로 피해를 주고받았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이 세상의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개인주의'인지 '이기주의'인지 경계가 모호한 시대입니다.
2017년 '욜로'의 시대를 지나 2020년 '플랙스'의 시대를 넘어가 2022년부터 '갓생'의 시대로 변화하는 정신적 유행을 바라보며, 마치 니체가 활동하던 19세기 유럽 허무주의에서 실존주의로 철학의 계보가 이동하던 시대상황이랑 요즘 대한민국 MZ세대와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어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개인주의란 진정 무엇인가? 라고 한번 고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개인주의를 버리게 되면 허무주의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는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상입니다
방문자 여러분들도 '욜로'니, '플랙스'니, '갓생'이니 너무 변화하는 유행만 따라가려고 하지 마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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