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의미는 생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인간은 단지 하루 더 생존하기 위하여 발악하는 동물들의 삶을 보며 의미를 느끼기 힘들다
영단어 'philosophy'는 철학이라는 뜻이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지식이란 무엇이고, 지혜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라 정의 내렸다. 같은 맥락에서 사실상 과학, 수학, 의학과 같은 현존하는 모든 학문은 결국 철학에서 뻗어나갔거나, 그 뻗어나간 것이 다시 또 뻗어나간 학문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세분화되며 깊어져 지금은 다른 것으로 보일뿐이다. 이론적으로 봤을 때 그 무수히 뻗어나간 가지를 타고 역으로 회귀하다보면 근본원인이 나오는데, 이것을 로고스(logos)라고 한다
요 1:1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란 그리스어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만물을 지배하는 근본원인으로 진리를 의미한다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먼저 알아야 한다
철학은 반드시 '로고스'라는 전제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
뭇 삶들은 단순히 스스로 사고하는 것을 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수준에서 공리로 인정되지 않는 로고스와 거리가 먼 사견들은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후회로 점칠된 허접한 작품으로 만들기 일 수이다. 예를 들어 근본 없는 실용학 같은 자기 계발서에서 강조하는 내용들, 다른 건 다 거두절미하고 철저하게 돈과 지위만을 추구하는 삶의 말로는 운이 좋아서 성공해 봐야 결국 허무와 공허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에 '나'에 비해 물질적으로 조금 성공을 거둔다 해도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또한 좁은 동네를 벋어나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만약 운이 안 따라줘서 실패하게 되면 그대로 패배자로 낙인찍혀버리게 된다. 안타깝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로고스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이길 수 없는 틱택토게임을 평생 해야 하는 팔자인 것이다
어느 한 문화권이나 국가, 즉 집단지성 수준에서 로고스와 거리가 먼 철학은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의 우생학 같은 위험한 사상으로 변질될 수가 있고, 마르크스주의 같은 검증되지 않은 채 이론만 그럴듯한 철학은 구 소련이나 중국(문화 대혁명), 북한과 같이 수많은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인명경시 사회로 향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봤을 때 요즘 우후죽순으로 창궐하는 한심한 개인의 개똥철학들과 사이비종교에 바탕이 되는 사상들을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안일한 생각은 잠깐 도려내야 하는 그 순간의 아픔이 싫어서 암세포가 서서히 자라는 것을 방치하다 결국 나중에는 손쓸 방도가 없듯이, 개인과 사회에 파멸적인 종국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우리는 단순히 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엡 6:17 진리(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로고스론의 창시자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균형의 원리'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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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과 문명에 발전을 위해서
서양철학은 현재 세계문명의 바탕이 되고 있는 사상이다. 그런데 철학이 다른 분야들과 완전히 다른 학문처럼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원래 철학의 하위 분야로 있던 학문들이 독립해 나가며 스스로 발전하며 세분화됐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형식 논리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논리상 흠이 없어도 그게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 동아시아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항상 철학이 부재된 사고방식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아시아의 철학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대부분 존재와 존재사이에 관계론만 설명했을 뿐, 좀 더 근본적인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돈과 지위만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풍습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듯하다. 동양인들은 항상 관계론과 같은 '현실에 쓸모 있는가?' 에만 집중했을 뿐 그것이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인구수 빨로 운이 좋게 어떠한 기술을 서양보다 먼저 발견한 적은 있었지만, 항상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지금도 아시아의 대표 격인 한, 중, 일 삼국은 서양이 과학을 통해 지식을 발표하면, 부랴부랴 모방해서 기술로 응용하여 돈 벌어먹기만 바쁘다는 악평을 듣곤 한다
이상하게 올림피아 같은 대회에서는 동아시아가 1등을 하는데, 왜 노벨상은 제대로 못 타는 건지 따져보면 아시아 방식의 교육은 지식의 암기만 가르치지, 근본 원인은 가르치지도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야 정부와 언론에서 주입식 교육을 그만두고 원리교육 같은 걸 해보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그 이유를 보면 로고스 그 자체의 깨달음과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노벨상 같은 걸 타서 국위 선양해야 된다는 걸 근거로 들고 있다. 전통적인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알맹이는 바뀌지 않고 학문과 지식을 철저히 쓸모 있는가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이러니 안된다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이란 봉사의 개념으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인데, 인과관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저열한 심성을 타고난 자들은 애초에 이타적인 개념자체가 없는것 처럼 보인다. 단지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욕망에 눈이 뒤집어졌기 때문에 정력을 투자할 뿐이다. 그러니까 비양심적인 것이든, 남에게 피해를 주 든 아랑곳없이 큰 고민없이 안 보이는 곳에서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며 앞에선 뻔뻔한 얼굴로 선량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마치 '법에 걸리지 않아서 피해만 안보면 장떙' 이라는 태도가 기본베이스인 것처럼 보인다
저열한 이들이 보기에 이득도 안 되고, 출세하는데 하등 쓸모없는 것 같이 보이는 서양인들의 철학적인 사고방식은 사실 근본적인 원인으로 가장 빠르고 직선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이다
2. 행복, 심리적인 안정감을 위해서
정신적인 힘은 철학에서 나온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참으로 인상 깊은 구절이다
요즘 추세는 피지컬적인 요소가 다분한 스포츠판에도 멘탈이나 마인드에 중요성이 가면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일반인들의 피지컬이 다 거기서 거기이듯이, 프로 운동선수끼리의 육체적 수준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마인드와 멘탈싸움인데, 누가 더 간절하고 끊질기며 전략적이고 영리하게 플레이하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이 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쉽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마인드와 멘탈의 영역부터는 철학이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은 의미 없는 고통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만, 의미가 있는 고통은 꽤 잘 견뎌낸다. 똑같은 인간이고 비슷한 조건인데 누구는 시련을 이겨내고, 누구는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냐, 없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때가 많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지는 않는다. 직관적으로 와닿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삶이나 존재와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이지 않고 난해하다
사람과 문명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크게 성장하는데, 철학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성장이 더디어 보여서 뭇 삶들에 비웃음을 사기 일수이지만, 눈덩이가 충분히 커지면 눈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듯이, 노선을 한번 타기 시작하면 복리효과가 상당히 발생한다.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견뎌내는 정신력이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벌기 위해 반복하고 있는 뭇사람보다 훨씬 강할 수밖에 없다. 경쟁자들이 불안해하고, 불평불만하며 스스로 힘을 깎아 먹을 때, 온전히 자기 자신에 향상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점을 행복의 영역에서 바라보자. 일단 헬조선 같은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든, 부유한자이든 마음은 똑같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불행한 원인은 다 다르겠지만, 결과가 불행하다는 값이 똑같다는 뜻이다
어떤 의도적인 작전세력이 있는 건지, 타고난 국민적인 기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간에 사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외부에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마음속에 로고스를 간직하고 있고, 그 로고스들이 철학으로 마음속에 단단하게 결합이 돼있다면, 외부의 상황과 조건은 상관없이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은은한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다
3. 로고스를 찾기 위해서
로고스를 찾기 위해서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로고스는 사유를 통해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그것만 해도 백척간두진일보이긴 한데, 그래도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반드시 몸과 삶으로 체득해야 한다. 결실을 거두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고, 보람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다
힘겹게도 우리들은 철학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고해의 바다로 던져졌다. 이론을 배우지 않은 채 필드로 던져지면 말 그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삶에서 유의미한 열매를 맺기가 힘들다. 성장을 위한 자기반성과 성찰은 철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능한데, 아쉽게도 철학은 수학이나 미술 같은 다른 분과학문에 비해 직관적인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애초에 이쪽에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접근성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도 철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삶과 세계의 이론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 말은 본능과 감정, 이성이 혼재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이 로고스를 찾는 이유는 '호기심'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된 근본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대중들은 철학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말로 반박이 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대중이 '호기심'과 '불안'이라는 요소를 최대한 제거한 기만적인 시스템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시스템 밖으로 튕겨져 나와 세계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똑같이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인간은 결국 '로고스'를 찾게 된다
계 19 :11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삶에서 역경이나 시련을 겪는다. 다소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별생각 없이 살고 있다가도 갑자기 인과가 무르익으면서 불행이 찾아왔을 수도 있고, 고행자를 자처하며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난을 찾아갔을 수도 있다.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에 차이일 뿐이지, 결국 누구나 언젠가는 삶이 주는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운이 좋게도 마주한 고통이 일정 임계점을 넘어가게 되면,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설계된 자동적인 소프트웨어에 드디어 '왜?'라는 물음이 들기 시작한다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그동안 미쳐 생각이 닿지 못했던 '나'와 '세계'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보통 여기서 크게 두부류로 나뉘는데, 어떤 부류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신을 찾고, 어떤 부류는 철학을 공부해서 삶의 본질 자체를 알고자 한다. 현실에서 두 부류는 허구한 날 서로 자기가 옳다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두부류가 똑같이 로고스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는 시대마다 새롭게 정의된다
철학이 종교와 마찬가지로 망상적인 지분이 일정 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와 달리 단순한 망상적 해결책으로 치부되지 않고 학문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철학이 로고스를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와 세계의 무수한 대상으로부터 환원이 된 공통적인 증거들을 추출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특정분야에서 초전문가적인 수준까지는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철학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학문들에 위에서 관조하는 초월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을 저술했던 철학자 해겔이 동시대 생물학 창시자인 다윈보다 생물학을 더 잘 알았을까?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유독 '천재신화'에 밈에 잘 은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대가 허영적인 이유로 명품 두르듯이 철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바깥세계의 일어나는 일들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세운 가정이 나 자신과 바깥세계와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교차 검증해야 되기 때문이다
종교도 태생적으로는 철학과 같은 망상이 근본이지만, 종교가 철학과 달리 폐쇄적인 경향을 띄는 이유는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도층들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기 좋은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종교는 폐쇄적인 특성으로 인해 세계와 연결점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약점을 신비적인 요소로 커버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다만, 아무래도 오래 유지되기가 힘들다. 새로운 경쟁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세계에는 진실자체를 추구하는 존재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종교는 근원에 대한 증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합당한 반례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리가 되기는 힘들다. 그래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유발한다
종교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앎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존재해 왔고, 과거에 로고스를 흡수한 채 2.0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사상을 가진 철학자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반박할 수 없던 이론도 결국 세계를 포섭할 수 없는 이론으로 여겨지고, 또다시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로고스가 구축되는 무한한 여정이 반복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해서 현대철학까지 이어지는 서양 철학사의 역사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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